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네빌 체임벌린 (문단 편집) === 총리 재임 === [[파일:attachment/네빌 체임벌린/anc-1.gif]] 1937년, 전임 [[스탠리 볼드윈]]의 뒤를 이어 대영제국의 총리로 취임하였다. 총리로 취임한 그의 당면과제는 역시나 [[나치 독일]]이었다. 독일은 무서운 기세로 주변국을 위협했고, 체임벌린은 독일 문제에 대해 외교적 해결책을 추구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독일-이탈리아 연대의 파기 시도였다. 두 파시스트 국가의 연합을 막기 위해 체임벌린은 [[이탈리아 왕국]]의 [[에티오피아]] 병합을 사실상 묵인했으며, [[스페인 내전]]에 대한 간섭도 막았다.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협상국]]이었기에 체임벌린의 생각이 크게 틀린 건 아니었다.[* 실제 이탈리아는 2차 대전 발발 직후, 영국에 연합국으로 참전할 수 있다는 의사를 타진한 적도 있다. 다만 그 전제조건이 이탈리아 지상군 전부를 현대화할 정도의 장비 요구라서 현실성이 없었다. 당장 영국도 대전 발발 후 본격적으로 육군력을 기르고 미국발 물량이 오기 전까지는 지상군이 굉장히 부실한 상태였다. 여러 현실적인 이유들 탓에 193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이탈리아는 1차 대전의 패전국인 독일을 시종일관 방해했으며 실제로 1934년 [[오스트리아 병합]]을 저지했다.(물론 히틀러는 나중에 한번 더 병합을 시도해 성공했다.) 그러나 [[베니토 무솔리니|무솔리니]]가 명분 없는 식민전쟁을 벌여 국제사회에서 고립당하자 손을 잡을 나라가 독일밖에 없었다.] 체임벌린이 이런 외교적 유화책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영국의 경제상황에 기인했다. [[대공황]] 여파로 대대적 군축을 한 상황에서 무력에 기반한 대독일 강경책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영국의 군사력은 재무장관으로서 군축을 주도한 체임벌린 본인이 누구보다 잘 알았고, 1935년경부터 본격적인 재무장을 시작했지만 아직 군사력의 재건이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1차대전때의 막대한 인구 손실을 기억하고 있던 [[전간기]] 영국과 프랑스는 어떻게 해서든 전쟁가능성을 피하려는 사회 분위기가 있었고 정치권도 예외가 아니었다. [[파일:external/timetree.zumst.com/716a7a9cc2c24c8fb1d482e1f3d04d2a.jpg]] >친애하는 여러분, 역사상 두 번째로[* 첫번째는 1878년 [[베를린 회의]]를 마치고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다우닝가 10번가 앞에서 한 연설이었다.] 영국 총리가 독일에서 명예로운 평화를 들고 돌아왔습니다.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나는 이것이 우리 시대를 위한 평화라고 믿습니다.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집에 돌아가서셔 평안히 주무십시오.]] >---- >1938년, 뮌헨 협정 뒤에 다우닝가 10번가 앞에서 한 연설 결국 이 문제는 1938년에 터지고 말았다. [[아돌프 히틀러]]의 [[주데텐란트]] 요구에, 체임벌린은 외교적 해결을 시도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뮌헨 협정]]이었다. 체임벌린은 뮌헨 협정을 통해 당분간 히틀러와 독일의 팽창의욕을 꺾었다고 생각했고, 여기에서 나름 유명한 "우리 시대를 위한 평화"라는 발언이 나왔다.[* 의미가 비슷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우리 시대의 평화'라는 표현으로도 잘 알려졌는데, 어느 쪽이던 긍정적으로는 쓰이지 않는다.][* [[몬티 파이선]]의 '[[세계에서 가장 웃긴 농담]]'에서는 나레이터가 '신형 농담은 영국의 전쟁 전 농담보다 6만 배는 더 강력했다.'라고 설명할 때 이걸 보여주면서 은근히 깠다.] [youtube(ZbzXozK1l8c)] 그러나 히틀러는 6개월 만에 뮌헨 협정을 파기했고, 다시 6개월 후 [[폴란드 침공|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 대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뮌헨 협정은 히틀러의 국내정치적 기반을 튼튼하게 해준 외교성과였으며, 독일 군부는 나치 정부를 탐탁치 않게 여겨 쿠데타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히틀러가 강대국을 상대로 오스트리아-주데텐란트-체코 삼연타석 외교 홈런을 치면서 지켜보자는 쪽으로 돌아섰고 이것이 폴란드 침공까지 갔다. [youtube(FQcaFI6m6DQ)] >I am speaking to you from the cabinet room at 10 Downing Street. This morning the British ambassador in Berlin handed the German government a final note stating that unless we heard from them by 11 o'clock that they were prepared at once to withdraw their troops from Poland, a state of war would exist between us. I have to tell you now that no such undertaking has been received, and that consequently this country is at war with Germany. >- 다우닝가 10번지 총리 관저에서 전달합니다. 오늘 아침, 베를린 주재 영국대사는 독일 정부에게 11시까지 폴란드에서 즉시 철수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면 양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내용의 최후 통첩을 보냈습니다. 허나 우리는 독일에게 어떠한 응답도 듣지 못하였고, 따라서 우리 영국은 독일과 전쟁 상태에 돌입했음을 말씀드립니다. 뮌헨 협정 파기 직후 체임벌린은 외교적 유화책을 포기하고 강경책으로 전환했으나, 폴란드가 망하는 와중에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독일에 맞서기 위한 전시내각을 수립하고 대독 강경파 [[윈스턴 처칠]]을 기용하였으나 노동당은 과거의 원한으로 전쟁내각 참여를 거부했고, 개전 이후 급격히 위세가 높아진 처칠 등 강경파도 좀 더 강경한 대응을 요구하여 국내정치적으로도 고립되었다. 체임벌린 내각이 기획한 [[노르웨이 침공|노르웨이 전역]]이 1달여 만에 패배로 끝나감에 따라 전시내각은 붕괴 위기를 맞이했다. 노르웨이 침공을 강력히 주장한 처칠은 --본인이 살려고-- 패배를 모조리 상관인 체임벌린 탓으로 돌리며 사임을 요구했고, 노동당도 체임벌린이 이끄는 전쟁내각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체임벌린이 노르웨이 전역에 투입한 육군은 실전경험이 풍부한 9개사단 9만명을 배치한 히틀러에 비하면 한줌도 안되는 갓 징집한 2개 여단 3천명 병력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독일에 비해 한참 늦게 진주했기 때문에 독일군에 전략적인 거점을 모두 빼앗겨 있는 상태였고 비행장 강행착륙점령이라는 창의적이고 공세적인 돌입을 감수하던 루프트바페에 비해 영국은 공군 배치를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 정도 차이의 병력 차이는 [[나폴레옹]]도 극복할 수 없다. 한편으로 영국이 일찌감치 노르웨이 개입을 준비했기 때문에 영국 해군은 독일이 상륙전을 개시할때 노르웨이 근방 작전선에 신속히 전개할 수 있었고 독일 해군에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 크릭스마리네는 노르웨이 전역을 마지막으로 작전능력을 영구적으로 상실했다. 해전에서의 승리와 육전에서의 패배는 영국이 동원할 수 있었던 함선과 병력의 차이인 것으로 해군이야 죽도록 지켜내어 강군을 유지했지만 육군을 쥐어짜내봐야 고작 그 정도 밖에 되지 않도록 꾸준히 재무장을 반대하고 빠른 병력전개를 반대한 체임벌린의 책임은 명백했다. >You have sat too long here for any good you have been doing. Depart, I say, and let us have done with you. In the name of God, go! >- 당신은 하는 일에 비해 그 자리에 너무 오래 앉아 있었다. 이제 그만 끝내고 그 자리에서 물러나라! >1940년 5월 7일, 영국 하원 회의장에서 [[https://en.wikipedia.org/wiki/Leo_Amery|레오폴드 에이머리]][* 처칠과 마찬가지로 대독 강경론자였으며 인도-버마 식민지의 전문가였다. 이 연설은 [[올리버 크롬웰]]의 명언을 인용한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에이머리의 이름은 두고두고 영국사에 이름이 남는다. 그러나 처칠과의 의견차이, 특히 인도 식민지 운영에 대한 견해차이로 전쟁내각에 기용되지 못했고, 전쟁 기간 인도 및 버마 식민지의 국무장관을 맡아야 했다. 독일 항복 직후인 1945년 7월 총선에서 낙선하고 세습귀족 임명 및 상원의원직을 제안받았으나 거부하고 정계를 은퇴했다.] 레오폴드 에이머리의 연설을 계기로 5월 7일, [[영국 하원]]은 체임벌린에 대한 재신임 투표를 실시했다. 이 투표는 신임 281, 불신임 200으로 겉으론 체임벌린의 승리로 끝났으나 기존에 비하면 지지세가 확연히 줄어든 상태였기에 사실상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과에 충격 먹은 체임벌린은 직후 처칠과 만나 총리직을 사임하겠다고 밝혔고 처칠은 체임벌린의 사임을 일단은 만류했다. 5월 9일에서 10일 새벽에 이르기까지, 반 체임벌린 세력과 처칠 옹립파들은 체임벌린 내각의 전쟁 지도 및 그 내각에서의 봉직 활동을 거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결국 정치적으로 고립된 체임벌린은 1940년 5월 10일 사임했다. 그리고 그 날, [[프랑스 침공]]이 시작되었다.[* 체임벌린으로서는 매우 운이 없었다. 아무리 노동당이 체임벌린을 싫어한들, 전 유럽에서 독일에 맞설 나라가 영국 하나뿐인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면 절대 비토하지 못했을 것이다. 체임벌린 내각 시기에는 아직 프랑스가 건재했기에 노동당도 체임벌린 밑에서는 전시 내각 참여 안 한다고 뻗댔던 거다. 실제 총리가 누구냐를 떠나 전시내각 참여 자체를 계속 반대하던 소수파들은 프랑스가 항복한 후 일제히 버로우했고 극소수가 종전 이야기를 꺼내긴 했으나 [[거국내각]] 부총리로 입각했던 노동당 당수 [[클레멘트 애틀리]]가 진압해버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